인생 3막
2023-10-23
인생 3막예비역 육군 대위 김002010년 2월 26일, 국군벽제병원(현 국군고양병원)에서 대위 계급장이 달린 잘 다려진 정복을 입고 전역한 그날, 축하와 격려와 우려 속에 내 인생 1막의 커튼이 내려지던 바로 그날, 나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가.전역을 1년여 앞둔 시기에 커피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취미로 평생교육원 주말반 과정을 수료한 후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서는 마치 전문가라도 된 양 함께 커피를 배웠던 민간인 친구들과 함께 카페 투어를 다니면서 어쭙잖은 커피 품평을 하기도 했고, 주말에는 늦잠 대신 서울 신촌 한복판의 3층짜리 카페에서 땀범벅이 되어가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 7일 근무의 패기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았을 ‘카페 사장님’ 자리까지 탐나기 시작했다. 전역을 앞두고 있었고, 진로는 미정이었으며, 딱히 잘하는 것도 없었기에 카페 창업이라는 막연한 ‘바람’이 부지불식간에 너무나도 확고한 ‘목표’로 자리 잡아 버렸던 것은 아닐까?전역하던 날, 아마도 나는 우아한 카페 사장님이 되어 떼돈을 버는 황홀한 미래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1막에서 2막으로 - 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장교로 9년간 복무한 나는 서른세 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진정한 독립을 했다. 독신자 숙소에서 짐을 빼 작은 투룸으로 이사하고, 경험을 쌓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산의 한 카페에 매니저로 취업했다. 쥐꼬리만 한 급여에 몸은 고됐지만 ‘나는 곧 카페 사장님이 될 몸이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신 승리로 버텼다. 그러던 중 나이만 먹었지 철없는 막내딸의 독립을 응원해주기 위해 고향의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1박 2일간 머무르다 떠나는 부모님을 배웅하고 텅 빈 집에 들어선 순간 그동안 꾹꾹 억눌러왔던 두려움, 외로움이 한순간에 폭발하듯 서러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 길로 짐을 싸서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급은 더는 들어오지 않고, 두 번의 이사와 살림살이 장만, 식비 등 기본 생활비 지출로 통장 잔고는 야금야금 줄어만 갔다. 주변에선 9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으니 1년 정도는 여행이나 하면서 재충전을 하는 것이 득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수라는 심리적 낙인을 감정적으로라도 용납할 수 없던 기질 탓에 오히려 마음만 더 급해졌다. 불안과 압박감으로 자기최면에라도 걸려버린 듯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도 왠지 나는 잘 해낼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바로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유동인구, 주변 상권 등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에서야 자영업은 첫째도 목이요, 둘째도 목이란 걸 알지만 그때의 나는 그저 ‘직감’과 빠듯한 ‘예산’만을 따졌다. 아파트단지 길 건너편에는 소형 공동주택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있었는데 거기 1층에 빈 상가가 났다. 25평의 적당한 면적이었고, 이전에 보험사 사무실로 쓰였던 공간으로 남아 있는 시설물이나 집기류가 없어 말끔하게 원상 복구된 곳이었다. 당연히 권리금은 없었고, 보증금과 월세도 합리적이었다. 그러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도, 25평 직사각형 공간에 투사되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테리어 시뮬레이션에 현혹이라도 된 듯 꿈에 부풀어 덥석 계약을 해버렸다. 임대차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그날 밤, ‘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하는 생각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창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머릿속은 그저 하얬다. 당시에는 인테리어 비용 적정선과 업체 선정 방법도 몰랐고, 영업신고며 사업자등록 절차도 몰랐으며, 심지어 세무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얼마나 막막하고 겁이 났겠는가 말이다. 식사가 되는 음식이나 주류를 판매하지 않으면 상호에 ‘카페’를 쓸 수 없다는 것, 단순히 음료와 디저트만을 판매하는 곳은 일반음식점이 아닌 휴게음식점으로 영업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지독한 겁쟁이가 충동적으로 덜컥 일을 저질러버렸으니 수습할 길이 막막했다. 온갖 다이어트를 해도 꿈적하지 않던 살이 저절로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맘고생 다이어트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가족 중에 자영업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주변의 도움 없이 오로지 혼자 인터넷 검색의 힘을 빌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을 진행해 나갔다. 인테리어가 한창인 가게와 집을 오가면서 길가에 차를 대놓고 펑펑 운 적도 여러 번이었으며, 위생 교육을 받으러 양구에 다녀오던 길에 교통사고가 날뻔한 아찔한 일을 겪기도 하면서 한 달여 만에 개업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전역한 지 약 8개월 만인 2010년 11월 6일, 나의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2막 - 나는 모든 여자의 로망을 실현한 사람? 호기롭게도 아르바이트생을 주말과 주중에 2명씩 채용했다. 아르바이트생이 2명 정도는 있어야 명색이 사장인 나는 진짜 사장님답게 한껏 우아하게 관리자로서의 업무만 처리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개업하고 겨우 한 달 만에 아르바이트생은 4명에서 2명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명으로 줄었고, 6개월이 채 되지 못해서는 하루 12시간 이상, 주 7일을 꼬박 나 혼자 감당해 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소위 말하는 오픈빨도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유동인구의 대부분은 저렴하게 한 끼 때우려고 골목 내 3,000원짜리 콩나물 비빔밥집을 찾는 손님들이었으니 밥값보다도 비싼 커피집으로 발길이 이어지긴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로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단지 내 수영장의 수강생 그룹(대부분은 입담 좋은 아주머니들)이 점심 단골손님이 되어주었다. 궁여지책으로 내건 아메리카노 2,500원 이벤트가 먹혔던 것이다. 대여섯 명씩 우르르 몰려와 2,500원짜리 아메리카노 서너 잔을 시켜놓고 2~3시간 동안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다가 썰물처럼 빠져버리고 나면 퇴근할 때까지 네댓 테이블의 손님이 전부였다.이듬해 여름엔 인절미를 빼고 직접 팥을 삶아 만든 옛날 팥빙수가 입소문을 타고 반짝 히트하면서 피크타임엔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해 간신히 버텼으나 가을이 되면서 매출이 다시 곤두박질쳤다. 취미가 업이 되면 불행해진다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가게를 오픈하고 처음 3개월간은 손님이 뜸해도 진심으로 행복했다. 출근하자마자 내리는 첫 에스프레소 테스트 샷이 너무나도 향기로웠고, 취향껏 선곡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공간에서 책을 읽는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수세미 한 장까지 내 손으로 채워 넣은 가게, 내가 만든 공간을 바라만 봐도 뭔가 이룬 것만 같아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봐, 나는 모든 여자의 로망을 실현한 사람이야.’라는 심리가 위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조한 매출 수치를 보면 볼수록 그런 만족감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냉철한 판단력과 단호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잘못됨을 감지한 순간 빠르게 가게를 정리하고 손실을 최소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단력도 배포도 없었던 나는 인건비는커녕 휴대폰 요금을 겨우겨우 낼 정도의 실낱같은 매출 순수익에 매달려 6년을 버티는 미련을 떨었다.꾸준히 하향곡선만을 그리던 매출이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때, 1년여의 지독했던 우울증을 간신히 극복하고 나서야 자영업 7년 차에 접어들던 2016년 12월에 공인중개사 사무소에 가게를 내놓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 간호사 면허증을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전역한 후 보건교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동기들을 보면 내심 부러웠지만, 그들만큼 치열하게 임용 준비를 할 자신이 없었기에 ‘교사는 내 적성에 안 맞아.’라는 핑계로 외면해버렸던 그 힘든 여정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적성 따위를 따지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비혼을 결심하고 혼자 살아가기로 한 나였기에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어떻게든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막다른 골목에 몰려 임용이라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기로 결심하자 놀랍게도 20년 가까이 손을 놓았던 공부에 고3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게를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가게에 꾸역꾸역 나가 손님을 받으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흐름이 끊기고 집중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다른 수험생들은 1분 1초도 낭비 없이 공부에 올인하고 있을 이때, ‘나는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공부해서 과연 한 번에 합격할 수 있을까? 합격을 못하면 재도전해야 할까? 가게는 계속 끌고 가야 하는 걸까? 만약에 합격하더라도 그때까지 가게를 넘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가게에 투자한 내 전 재산을 날리는 건가?’ 공부를 시작한 지 반년 만에 불투명한 상황을 탓하며 지독한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그렇게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것마저도 사치였던 나는 환기가 될만한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좋게 말하면 상식, 정직하게 말하면 잡지식이 많았던 나는 그 당시 매일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듣던 라디오(굿모닝FM 노홍철입니다) 퀴즈쇼에 신청 사연을 남겼다. 운이 좋게도 사연이 채택되어 라디오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 앞에 나설 일이 있으면 한참 전부터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쿵쾅할 정도로 소심한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얼굴도 안 보이는 라디오에서조차 말 한마디 못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임용 면접관 앞에서 면접을 볼 수 있겠나’라는 생각에 용기를 끌어모아 출연을 승낙했다.1승을 하고, 2승을 하고 5연승을 하는 동안 매일 아침 긴장과 설렘이 슬럼프가 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퀴즈쇼 우승이 자기 효능감을 불러일으켜 다시 임용 준비에 매진할 수 있었다. 우연치고는 신기하게도 5연승을 거머쥐고 김치냉장고를 확보한 바로 그날, 그나마 북적대던 점심시간에 찾아온 손님이 커피숍을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그 후 일사천리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렇게 7년 동안 건물주 좋은 일만 시키고 초기 투자금의 30% 정도만 겨우 건진 채(엄밀히 따지면 7년간 내 인건비도 건지지 못했으니 손실은 더 어마어마하다.) 2017년 9월 17일에 최종적으로 가게 열쇠를 넘겼다.2막에서 3막으로 - 조금 늦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의지 ‘자, 이제부터가 진짜다!’ 결의를 다지고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빼곡하게 계획을 세우고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16시간가량을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했다. 다리가 퉁퉁 붓고, 지독한 변비가 생겼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번에 합격해야만 했다. 공부할 범위가 워낙 넓었고, 나이 마흔에 하는 공부이다 보니 체력뿐만 아니라 집중력, 기억력이 따라주지 않아 답답함과 막막함으로 잠들기 전에 눈물범벅이 되는 일도 잦았다.두 달여의 지난한 시간이 흘러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온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수능 1주일 뒤가 임용고시일이었는데, 자칫 이것도 미뤄질 수 있다는 소문에 임용 준비생 인터넷카페가 술렁였다. 이제 일주일만 버티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1주일을 더 그 지긋지긋한 공부와 사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다행히 ‘2018 중등교원임용경쟁시험’은 예정대로 치러졌지만 연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 잠깐 동안 정말이지 지옥을 맛봤다. 그 정도로 공부에 영혼을 갈아 넣었던 시기였다.그렇게 1차 시험이 끝나고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쯤, MBC 총파업(내가 퀴즈쇼 5승을 하고 얼마 뒤인 9월 4일부터 11월 15일까지 MBC 총파업으로 라디오 정규 방송도 잠시 중단되었었다.)이 끝나 방송이 재개되어 나와 왕중왕 자리를 놓고 겨루게 될 또 한 명의 퀴즈쇼 5승자가 탄생했다. 왕중왕전을 위해 다시 라디오에 출연하게 되었고, 시작하기에 앞서 노홍철 DJ는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간호장교에서 커피숍 사장으로, 거기에 임용고시와 왕중왕 도전까지!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고, 그리고 그걸 기어이 이루어내는 집념의 참가자입니다.”나를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칠지도 모르겠다. 결국엔 왕중왕에 등극해 마카오 여행상품권을 거머쥐고, 임용고시 1차 합격에 이어 면접까지 최종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나는 도전 정신이 투철하지도 집념이 강하지도 않다.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기 좋아하고, 지독한 겁쟁이에, 일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성격이다. 거기에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 신중하지 못하고 감정적이어서 때론 바닥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지는 않는다. 내게는 고통을 감내해내는 ‘맷집’과 조금 늦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의지’가 있었다. 그러한 의지 덕분에 지금 나는 강원도 원주의 한 초등학교 보건교사가 되어 인생 3막을 살아가며 이렇게 지난날을 돌아보고 있다.동료 교사들 역시 간호장교 출신에 커피숍을 7년간 운영했던 내 이력을 알고 나면 대단하다고 추켜세운다. 이는 모르는 소리다. 장교가 그리 멋있지만은 않고, 커피숍 사장님이 우아하지만은 않다는 걸 내가 아무리 얘기한들 겪어보지 않은 그들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원해서, 능력이 있어서 손바닥 뒤집듯 쉽게 직업을 바꾼 게 아니란 것도 굳이 입 아프게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퇴직 후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급했던 나의 실패를 바탕으로 거듭 신중하라고 조언한다. 손님으로 가서 보는 그 이면에는 바쁘면 바쁜 대로, 손님이 없으면 손님이 없는 대로 고통이 따른다는 걸 알아두면 좋겠다. 그걸 다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고, 충분한 여유 자금과 장기간의 시장조사 등 철저한 준비를 거쳐 창업하라고 당부한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전역 후 창업의 실패를 겪었지만, 후회보다는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지금은 생계를 위해 내가 잘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다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나’를 꿈꾼다. 퇴직 후 나만의 커피숍을 부활시키기 위해 오늘도 나는 성실히 출근길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