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가정의달 '리;스펙 제대군인' 주제는 "배려" 입니다.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마음'입니다.여기에서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은 먼저 상대에게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무조건적인 도움과 보살핌은 배려가 아닌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억지로 배려를 강요하는 것 역시 진정한 배려가 아닙니다.보살펴주려는 마음은 상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고 듣고 살피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터널의 한줄기 빛예비역 육군 대위 함00벌써 강산이 한 번 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렇게 수기를 쓰는 시간이 참 행복하기만 하네요. 저는 현재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고, 소방공무원 생활에 매우 만족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대군인지원센터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 시간이 오지 않았을 거라 확신합니다. 제가 힘들어 도움이 절실할 때 센터의 지원이 정말 큰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저는 큰 꿈을 품고 장교의 길을 선택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의 삶에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라 부하를 통솔하는 지휘관 임무 수행에 어려움이 있었고 중대장 임무 수행의 고군반 교육과정에서 동기를 통해 배운 운동처방에 관심을 가져 이를 전공하고자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6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대위로 전역했습니다.전역 후 운동처방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제가 생각했던 배움과는 거리가 있어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많은 돈을 지불하고 대학원을 졸업해 운동처방사 1급자격증을 취득해도 자격증이 취업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결과적으로 취업을 못 하면 군에서 아등바등 모은 돈만 날리고 다시 무언가를 시도할 형편이 안 되었습니다.더구나 당시, 제게는 군에서부터 사귀어 온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니는 백수 처지라 감히 결혼은 꿈도 못 꾸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사랑의 결실이 생겨 급하게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축복받아야 하는 일이 지만 준비가 전혀 안 된 제 심정은 너무나도 복잡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 끝에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렸다가 호되게 혼이 났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변변한 돈벌이 없이 가족을 만들어 제 삶이 힘들어질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날은 몇 시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골목을 돌고 돌았던 기억이 납니다.하지만 결혼을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아내의 고향은 충북의 시골 마을이라 임신한 여자가 미혼으로 지내는 것은 시골 어르신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면서도 눈앞이 캄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리지? 막노동을 해야 하나? 보험회사를 다녀야 하나?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답을 정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때 아내가 잘 견뎌 볼 테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보라고 했습니다. 평소 묵묵한 성격이 공무원에 맞을 것 같다면서요. 저도 고민 끝에 그게 가족을 위한 최선이라는 생각에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1년 이상 버틸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8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9월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정말 힘들었습니다. 항상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을 걷는 느낌이었습니다. 터널의 끝은 나오긴 하는 걸까? 암담함과 무력감에 처음 한 달간은 도서관에서 엎드려 잠만 잤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자신이 너무 한심했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슴에 중압감이 쌓였습니다. 어느 날 가족을 위해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이 서며 정신을 차렸습니다. 처음에는 일반 공무원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경쟁률이 100:1이 넘 어 태산처럼 높게 느껴졌고 ‘과연 내가 백 명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솔직히 겁이 났습니다. 그때 전역 후 인천에서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친구가 소방공무원을 제안했습니다. 최근 3교대 전환으로 인원을 많이 선발한다는 말에 저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소방공무원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제게는 총 세 번의 시험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기도, 서울시, 강원도의 시험이었고, 강원도 원주에 살고 있어서 강원도에 합격하고 싶었지만 벌어놓은 돈이 나날이 줄어드는 상황이라 어느 지역이든 합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소방공무원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1종 자동차 면허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2종 면허를 갖고 있었으나 소방관 지원 자격을 갖추고 0.5점의 가산점을 동시에 받기 위해서는 1종 대형면허 취득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학원 등록비는 40만 원 정도였고 당시 40만 원이면 우리 가족이 며칠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상당한 금액이었기에 등록비가 너무 큰 부담이었습니다. 마침 그즈음에 전역한 동기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제 결혼식에 못 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축의금 대신 알려준 곳이 제대군인지원센터였습니다.6년밖에 군복무하지 못한 저도 대상이 되어서 1종 대형면허 학원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기억으론 100만 원 중 반은 전액 지원, 나머지 반은 50%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원을 등록해 연습을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2종 면허를 딴지는 8년이나 되었으나 운전을 해 본 경험이 없어 클러치부터 새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껴 교육시간 10시간 외에 강사님께 간곡히 부탁드려 잘하는 연습생이 교육받을 때 뒷자리에 타서 곁눈으로 더 배웠고 그 시간만 5시간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코스도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커트라인 80점에 13분 51초로 아슬아슬하게 대형면허를 취득했습니다. 몇 초만 늦었어도 79점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떨어지면 재수강에 25만 원을 더 내야 해서 악착같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힘들면 핸드폰 안에 있는 아내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소방공무원 필기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 7시에 아내가 싸 준 2개의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서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 10시에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1월에 아기가 태어났고, 아내는 겉으로 내 색은 안 했지만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무거운 몸으로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모습을 보며 미안함에 가슴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홀로 휴게실에서 도시락을 꺼내려는데 아내의 쪽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자기를 믿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떨어지면 내가 먹여 살릴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콧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밥을 먹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합격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심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되뇌었습니다.하지만 공부는 생각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도서관에서 혼자 책을 보며 준비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어떤 게 핵심인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보통 다른 수험생들은 노량진에서 학원을 다니거나 동영상 강의를 수강하는데 당시, 생활에 여유가 없는 제게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대군인지원센터에 문의했는데 그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제대군인지원센터와 노량진의 유명한 학원이 제휴가 되어 있어 동영상과 책을 무료로 지원받았습니다. 강의를 들으니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이해되었고 모자랐던 부분이 채워졌습니다. 비로소 정체된 공부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때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지원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 혼자 속을 끓이며 제자리를 맴돌다 어느 순간 지쳐 주저앉았을 것 같습니다.그렇게 첫 번째 경기도 소방공무원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준비 가 부족했는지 4점 차로 낙방했습니다.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아 강원도에서 치르는 시험까지 가면 생활이 빠듯해서 서울 시험에 전력을 다했지만 서울 시험도 4점 차로 낙방했고 못난 저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습니다.강원도 필기시험 발표 전날 인터넷에 올라온 명단을 수십 번 확인했지만 제 이름은 없었고 아내와 저는 망연자실했습니다. 하지만 이 명단은 누군가의 장난이었습니다. 다음 날 나온 진짜 명단에 제 이름이 있었고 하루 만에 지옥과 천당을 오간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체력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체력시험 당일 제 아내와 돌도 지나지 않은 아들이 함께했습니다. 마지막 왕복달리기를 할 때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아내와 아들이 보였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서 죽을 듯이 괴로웠지만 절대 멈출 수 없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저 앞에 있는데 여기서 주저앉을 바에는 차라리 심장이 터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을 망막에 새기며 결승점에 들어와 체력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을 올렸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자기 출근할 때 옷도 바로잡아 주고 싶고, 뽀뽀도 해 주고 싶어.^^ 잘 다녀오라고 ~.” 저도 남들에게는 일상이겠지만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그 인사를 너무나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출근 첫날 아내가 제 옷을 잡아 주면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을 때 목이 메고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소방공무원 합격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둘째가 벌써 4학년이 되었습니다.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때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이 행복은 없었을 겁니다. 항상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 따뜻한 순간이 올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제대군인지원센터에 감사드리고, 더 많은 제대군인 분들이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더 많은 기회를 얻어 스스로의 앞날을 밝히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